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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악녀시대] 20

2021-07-09     이상우 작가

자기들 조직의 남봉철 같은 냉혹한 보스가 언젠가 자기들을 찾아낸다면 온전하게 살려 두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수퍼마켓을 계약하고 오던 날이었다. 먼저 집에 들어온 구형주는 아무래도 이상한 예감이 들어 문밖에 나간 박정자를 찾아보았다.

그때 박정자는 마을 앞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 있었다. 그녀는 구형주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그만 명함 같은 것을 핸드백에서 꺼내 놓고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혹시 정자가⋯’

그는 정자가 서울의 큰형님 남봉철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났다. 그렇다면 박정자가 지금까지 자기의 동정을 일일이 조직 보스한테 보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정자가 나를 배신하고 그런 짓이야⋯’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불안한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구형주는 먼저 집에 들어와 앉았다가 뒤에 들어오는 정자를 보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이 물었다.
“왜 늦었어?”
“응, 그냥⋯”

정자는 어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으로 가면서 방바닥에 휙 집어 던진 핸드백에 구형주의 시선이 닿았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재빨리 그녀의 핸드백을 열어보았다.

조금 전에 전화 걸 때 본 것 같은 명함을 찾았으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명함 크기만 한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서너 개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황금 714 ⋯
문자 519 ⋯
창 442 ⋯

이런 식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형주는 ‘황금’이란 것이 서울의 황금 살롱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자가 무엇 때문에 황금 살롱에 자주 전화를 걸었을까? 황금 살롱은 보스 남봉철이 사랑방처럼 사용하는 곳이 아닌가? 그곳의 주 마담은 남봉철의 조직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한 구형주는 벌떡 일어섰다.
‘여자는 절대로 믿어선 안 돼. 어릴 때 형들이 그렇게 일러 주었는데도⋯’
그는 그 이튿날 정자 몰래 수퍼마켓 계약을 파기해 버렸다.
“뭐라구요? 일을 이렇게 낭패를 시켜도 되는 기여?”

주인이 펄펄 뛰었다. 구형주는 계약금을 한 푼도 되돌려 받지 못했다.
“계약서를 좀 주십시오. 그건 찢어버리는 게 좋겠어요.”
구형주는 혹시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계약서를 자기 손으로 없애 버리려고 했다.
“일 다 끝난 판에 그 까짓 거 찾아서 뭣에 쓴당가? 내가 박박 찢어버릴 테니께 걱정들 말더라고.”

그가 막무가내로 나오는 바람에 구형주는 꼭 찢어 없애야 한다고 다짐만 하고 그냥 왔다. 그러나 그것이 뒤에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구형주는 박정자와 헤어지고 돈을 챙겨 따로 도망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사는 집의 전세금을 정자 몰래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자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봐, 형주 씨, 나 몰래 전세금 빼서 도망치려고 했지?”

빨갛게 달아오른 정자가 길길이 뛰면서 대들었다.
“이 비겁한 놈의 새끼. 내가 너 같은 놈을 사내라고 믿고 잠옷 차림으로 야반도주해서 따라 오다니! 아이구 내 팔자야. 이 새끼야, 나를 여기 버리고 돈 다 움켜쥐고 어디로 도망치려고 했어?”

박정자도 만만한 여자는 아니었다. 고아원에서 자라 눈치는 눈치대로 발달했다.
열대엿 살 때부터 이 남자 저 남자의 아랫배에 깔리며 인생을 배운 민들레였다.
“그래 너는 잘한 게 뭐냐? 나 몰래 황금  살롱에  전화해서 고자질했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일일이 일러 바쳤지? 나를 그 독사 같은  남봉철에게  팔아넘기려고 했지? 그래, 흥정이 잘 안 되더냐? 밤엔 히히닥 거리며 가랭이 벌리고 누워 엉덩이 돌리고 낮엔 고자질하느라 전화기 돌리고⋯”

구형주도 만만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황금 살롱 이야기가 나오자 서슬이 퍼렇던 정자도 큰 소리를 치지 않았다.
“그래, 서로 못 믿게 된 마당에 이젠 깨끗이 갈라서자. 남은 돈 반씩 갈라! 두말할 것 없어.”

정자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난 그렇게 못하겠어. 애당초 이 돈을 가지고 온 사람은 나야. 내 목을 걸고 뚱쳐온 돈이란 말야. 넌 이 집 전세금이나 빼서 가져.”
“뭐라고? 이 날강도 놈 같으니라구. 이 집 전셋돈이 얼마냐? 돈 250만 원에 나가떨어지란 말이야?”

“나야 지금 나서면 당장 굶을 판이지만 너는 사정이 다르잖아?”
“무슨 사정이 달라?”
“밑천 팔면 되잖아. 엉덩이만 잘 돌려 봐. 돈도 나오고 밥도 나올 텐데.”
“이 썅놈의 새끼!”
정자가 열 손톱을 곤두세우고 구형주에게 덤볐다.

달콤하던 사랑의 도피는 한 달도 못 가서 파탄이 나고 말았다.
“이게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아주.”
구형주가 손바닥으로 정자의 뺨을 때렸다. 철썩 소리와 함께 정자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이놈아, 너 죽고 나 죽자.”
정자가 형주의 팔을 물어뜯고 늘어졌다.

“아야야. 이 잡것이!”
형주가 발로 정자의 아랫배를 차버리자 정자가 문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저 강도 놈이 사람 죽인다!”
정자가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소리 지르자 형주가 뛰어나와 마구 주먹질 발길질을 했다.
“아이구, 선생님들이 워쩐 일루 이래 싸시요.”

“어매, 이기 뭔 일이야?”
주인집 부부가 쫓아와 말렸다. 점잖은 선생님 부부가 이럴 수 있느냐는 듯 너무나 놀라는 모습이었다.
주인 부부의 선생님이란 말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날뛰지는 않았다.
“전셋돈에다 내 한 오백 더 줄 터이니 그걸로 싹 끊자.”
형주가 타협안을 다시 내놓았다.

“말하기도 싫어, 당신 같은 악질은 보기도 싫어,”
정자가 분이 풀리지 않아 타협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등을 돌려댄 채 밤을 보냈다. 그들이 도망 나온 이후 옷을 벗지 않고 자기는 처음이었다.

그 이튿날 새벽 느닷없이 형사 한 사람이 구형주의 셋방으로 찾아왔다.
밖에 나가 세수를 하려고 얼씬거리던 형주가 누가 와서 주인 남자에게 자기 이름을 대는 소리를 엿들었다. 그는 남원서에서 나왔으며 구형주를 꼭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수퍼마켓에서 신고가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을 하더란 것이다. 형주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우선 있는 가방과 통장을 챙겨들고 대문을 빠져나왔다.
그는 뛰다시피 큰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뒤쫓아 오는 형사에게 들키고 말았다.

“구형주, 거기 서지 않으면 쏜다!”
형사의 고함을 들으며 그는 그대로 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뒤통수에서 들리는 권총소리는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도주 한 달이 못 되어 경찰에 붙잡히고, 만 것이다.

25. 벗겨지는 흑막

“반장님, 반장님⋯”
강 형사가 숨이 턱에까지 차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추 경감에게 뛰어왔다.
“나 숨 안 넘어갔는데. 천천히 해. 자넨 그 덤비는 버릇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잘 안 풀려. 쯧쯧.”

추 경감이 혀를 차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자하문장의 정필대 사건과 관련 있는 구형주란 자가 체포되었답니다. 남원서에서 검거했는데 어제 서울 관할서로 이송되어 왔답니다.”

“구형주? 그게 누구야?”
“히로뽕 밀매단인 남봉철파의 조직원이랍니다. 그날 정필대가 피살될 때 그 여관에 있었던 놈입니다.”
“그럼 종업원 박철호가 도망간 것을 감추고 있던 그 놈이야?
여자가 도망갔느니 어쩌느니 하던⋯”

“예, 맞습니다. 그 놈이 정필대 살해 사건과 관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 놈은 자기 조직인 남봉철파에서 쫓고 있었답니다.”
“자기 조직에서 왜?”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여자하고 도망을 쳤기 때문입니다.”
“음⋯”

추 경감은 일어서서 실내를 두어 바퀴 돌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놈을 우리가 데려다가 심문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놈이 정필대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방태산 사건과도 분명히 관계가 있을 텐데⋯”
“정계의 뒷골목을 주름잡으며 정치를 돕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 폭력 불법조직은 예나 지금이나 있는 법이야. 그 남봉철파도 어느 정치인과 선이 닿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마약반에서 보고 있거든⋯”

“이 사건을 좀더 상부에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정필대, 방태산, 남봉철 등을 통합수사하는 수사본부 같은 것을 본부 차원에서⋯”
“이봐, 자네가 내무장관이야?”
추 경감이 핀잔을 주자 강형사는 혀를 낼름 내보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강 형사가 최 경감에게 “양해를 얻고 그쪽 수사 기록을 좀 가지고 오지. 그리고 구형주를 직접 심문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반장님이 최경감에게 전화 좀 넣어주십시오. 제가 가 보고 오겠습니다.”
강 형사가 손때 묻은 수사 기록부를 들고 나가면서 말했다.
강 형사는 구형주에 관한 신상 기록을 대강 훑어본 뒤 그를 면회 형식으로 불러내 몇 가지 심문을 했다.

구형주는 전과 4범으로 폭력이 2범, 마약단속법 위반 1건, 사기 1건으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 구속된 죄명은 마약 불법소지였다. 그의 하숙집에서 소량이긴 하지만 히로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그것과는 상관 없이 정필대 피살 사건의 관련 여부를 집중적으로 캐고 있었다. 경찰이 지금까지 그에게서 알아낸 정보는 별로 없었다.
강 형사와 만난 구형주는 아직도 풀이 꺾이지 않았다. 자기가 뚜렷하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강 형사는 경찰서 복도에 있는 벤딩머신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구형주와 마주 앉았다.

“우리 커피 한잔 하면서 이야기 좀 할까? 난 이 경찰서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시경에 있는 강이란 사람인데⋯”
“강인지 강아진지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인걸.”
구형주는 커피잔을 들어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주르륵 부으면서 말했다. 입가에는 싸늘한 냉소가 흘렀다.

강 형사는 피가 거꾸로 올라오는 모욕감을 느꼈다. 당장 주먹으로 박살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강 형사는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을 가라앉혔다. 구형주는 커피를 버린 종이잔을 한 손으로 움켜쥐어 구겨버린 뒤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강 형사를 보고 이래도 약오르지 않느냐고 하는 것 같았다.
“어때? 한잔 더 가져올까?”

강 형사가 저 녀석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강 형사는 내심, 나도 이제 형사 생활 십여 년에 능구렁이가 다 되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저한테서 알고 싶은 게 뭐요?”
구형주는 강 형사를 만만한 경찰관은 아니라고 판단한 듯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몇 가지만 묻겠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이야. 좀 협조해 주겠어?”
“말해 보슈. 담배 한 대 주시겠수?”

강 형사가 그에게 담배를 주고 불을 붙여 주면서 물었다.
“왜 남봉철을 배신했나?”
“난 형님을 배신한 것 아닙니다. 그냥 숨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해서⋯”
“누가 그랬나?”

“박철호가 여기 형사가 와 있으니 딴 곳에 가 있으라고 해서⋯”
“그날 자하문장 여관에는 무엇 하러 갔었나?”
“형님 심부름으로 갔었지요.”
“무슨 심부름이었나?”

그 대목에서 구형주는  한참 생각했다. 강형사는 독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돈을 전하러 갔습니다.”
“돈?”
“예.”
“누구에게?”
“그 이름을 댄다면 나를 풀어 주어야 할 거요. 아니, 그 전에 내가 한번 물어봅시다. 나를 무슨 죄로 이렇게 잡아넣은 겁니까?”
“당신 집에서 히로뽕이 나왔다는 것 몰라?”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진짜 이유는 뭡니까?”
“당신이 도망친 이유는 뭔가? 박정자하고 말이야.”
“정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쁜 년 같으니라고.”
정자라는 말이 나오자 구형주는 흥분했다.

“박정자는 아무 죄가 없어요. 당신을 남자라고 믿고 따라간 것이 잘못이지.”
“그렇지 않아요. 그년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내 행동을 일일이 형님에게 전화로 보고했단 말입니다. 밤낮으로 가랑이 잘 벌려 주기에 난 깜박 속고만 있었단 말입니다. 여자란 요물이니 잠자리만 벗어나면 믿지 말라고 하던 아버지 말씀을 지켜야 하는 건데...

구형주가 침을 튀겼다.
“그년이 나쁜 년이긴 하지만 그거 하나는 솜씨가 기가 막히거든요 그년이 나를 배신하다니 어디 잡히기만 해 보아라 가랑이를 찢어서 다시는 그 짓을 못하게 해버릴 테니까”

구형주는 흥분해서 이 세상에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붓는 것 같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주먹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했다.
“그건 당신 오해야. 박정자는 황금 살롱에 있는 주 마담한테만 전화를 했던 거야.”
“주마담이 형님 이건데 그게 그거지요 뭐.”

구형주가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고아 출신인 박정자는 고아원에서 의남매를 맺은 동생이 있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걔 걱정이 되어서 주 마담한테 돌봐 주라고 전화를 한 거야. 주 마담한테 가명을써서 온라인으로 당신 몰래 돈도 부쳤어.

그러나 자기가 있는 곳은 절대 주 마담한테 말하지 않았더군. 주마담은 정자와 당신이 있는 곳을 알아내 가지고 남봉철과 흥정을 한 판 벌여 볼 심산이었지만, 박정자는 절대로 자기가 있는 곳을 밝히지 않았어. 박정자는 당신을 배신한 일이 없어. 당신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착한 여자야.”

“강 형사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아냈어요?”
“내가 황금 살롱에 붙어 살다시피 했지. 남봉철과 차주호의 관계를 캐려고 말이야.”
“정자가 정말 내가 있는 곳을 대지 않았나요?”
“정말이라니깐.”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정자야. 미안하다.”
구형주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괴로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