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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악녀시대] 9

2021-04-23     온라인뉴스팀

“딩동.”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렸다. 흰 눈이 쏟아지는 깊은 밤이었다.
미혜는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현관은 열지 않은 채 나직이 물었다.
“나야, 나. 방태산이다.”
미혜가 조용히 문을 땄다.

“아이고 무슨 날씨가 이 모양이고. 어이구 추워라.”
방태산은 어깨까지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 과는 달리 머리도 수염도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얼른 옷 벗으시고 아랫목에서 몸 좀 녹이세요. 따뜻한 커피 가져올게요.”
미혜는 어른스럽게 침착했다.
“커피는 뭔 커피고. 고마 이리 오이라. 네 보고 싶어 환장했다.”
방태산은 돌아서는 미혜의 어깨를 덥석 껴안았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그녀를 방바닥에 넘어뜨리고 얼굴을 부벼댔다. 미혜는 크게 저항도 하지 않고 덮치는 얼굴을 받아들였다.

방태산은 미혜를 눕혀 놓은 채로 황급히 옷을 벗어 아무곳에나 집어던졌다. 금세 알몸이 된 방태산은 미혜의 얇은 잠옷을 찢을 듯히 황급히 벗겨 냈다.
“아이⋯ ”

미혜는 너무나 급히 서두르는 방태산의 손을 거들어 스스로 브래지어 끈을 풀고 팬티를 발치로 벗어내렸다.
방태산의 급한 성미를 잘 알기 때문에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방태산은 억센 손으로 가녀린 미혜의 유방을 움켜쥐고 거칠게 그녀를 다루었다.

“좀 천천히⋯ 저 도망 안 가요.”
미혜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구 밀고 들어오는 방태산의 남성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리 이제 곧 형편 필 거다. 오늘 정치 규제법 풀린다고 야단이다.”
방태산은 그의 작업을 멈추지 않고 숨을 바삐 몰아쉬면서 떠들었다.
미혜는 방태산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그의 목을 팔로 감았다. 그녀의 몸 깊은 중심에서 쾌락의 씨가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방태산이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긴장은 절정을 향해 한 계단씩 올라 갔다.

“선거가 머잖아 있을 모양인데, 이번엔 꼭 당선될 거다. 정치 규제법에 묶여서 투쟁한 놈 표 안 주고 어느 놈 줄꺼 같나. 군부가 결국 나를 거물로 만든 것⋯ 흐, 흠.”

방태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을 토하며 몸부림쳤다.
방태산이 미혜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한참 뒤였다.
그는 따뜻하지도 않은 맨 방바닥에 널부러져 담배를 피워 물고 포만감에 젖어 있었다.

“내 말 알아들었나?”
방태산은 미혜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자 큰 소리로 되물었다.
“예? 무슨 규젠가 뭔가라고 하셨죠?”

“허허 참. 정치 규제가 풀린다 이 말이다.”
그제야 미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방태산은 자기가 정치 활동만 할 수 있게 되면 미혜와 꼭 결혼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미혜가 방태산의 가슴을 쓸어안으며 말했다.
“속고만 살았나? 사나이 하는 말에 무슨 토를 그리 달아대는 거야? 요걸 고마 칵 잡아먹어 버릴까?”

방태산은 미혜가 귀여워 죽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오늘 총재님을 만났다 이거야. 서울  제13지역구는  내 거라  이거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저만 버리지 말아 줘요.”

“허허, 버리다니? 네가 내 은인인데 어찌 버리겠나? 내가 패가망신하고 쫓겨 다니니까 한 놈도 내 도와주는 놈 없더라. 나한테는 미혜 니밖에 없다 이거야.”
방태산이 미혜의 빰에 입술을 부볐다.
“오늘 그래서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나가셨었군요.”
언제나 따갑기만 하던 방태산의 얼굴을 생각하며 미혜가 물었다.
“흐흐흐⋯ ”

“우리 결혼은 언제 해요?”
미혜는 오래전부터 하고 싶던 말을 내뱉었다.
“결혼? 암, 해야재.”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방태산의 목소리에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언제 해요?”

“글쎄 말이다. 너하고 내가 차이가 얼마고? 열두 살이던가?”
“그것과 결혼과 무슨 상관이에요?”
미혜는 방태산의 말에서 어렴풋이 불안 같은 것을 느꼈다.
“여편네 그년은 도망가고 없다만서도⋯  너 내 말 잘 새겨들어라. 너하고 내하고 열두 살 차이면 그게 적은 차가 아닌기라. 이제 나는 늙어 가고 너는 한창 피어나는 나이에⋯ ”

“우리 딴 이야기 해요.”
미혜는 방태산의 입을 막고 말았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가 어쩐지 겁이 났던 것이다.
그들이 알게 된 것은 미혜가 대학교 1학년 때 그의 사무실에 아르바이트를 갔을 때였다. 지역구 주민들에게 추석을 맞아 인사장을 보내는 일이었다. 방태산 대신 서명을 하고 주소를 적는 일이다. 그곳에서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곧 방태산의 눈에 들었다.

풍성한 머리에 큰 눈동자, 작은 입술, 그리고 어린 만큼의 순박함이 그녀에게는 가득했다. 방태산은 곧 그녀에게 접근했다.
방태산 역시 못생긴 축에 속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미혜는 객지에 오래 살면서 따뜻한 정이 그리웠다. 누군가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의논해 줄 사람이 그리웠다.

미혜의 고향은 괴산이었다. 언니가 한 명 있기는 했지만 미혜가 서울에 올라오기 바로 직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의 길을 밟게 되었다. 기업체에서 대주는 장학금으로 공부를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외톨박이 미혜에게 신사로 위장한 방태산이 접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여자 다루기에 이력이 난 방태산에게 순진한 여대생 하나 손에 넣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던 것 이다.
그들의 관계는 어느 정도는 로맨틱한 것이었다. 미혜에게 있어서 방태산은 연인이요, 아버지요, 선생이었다.

그러던 관계가 결정적으로 깊어진 것은 정치 규제가 실시되면서부터였다. 어수선하던 정국을 틈타 정권을 잡은 군부는 구 정치인들의 타도에 전력을 쏟았다. 방태산도 그 명단에 속해 있었다. 3년간 다진 발판을 무기로 정계에 다시 도전하려던 방태산으로서야 속이 뒤집히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급했다. 그는 체포를 면하려고 미혜의 집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계엄 당국이 꼭 검거해야 할 만큼 거물도 아니었다. 거물들
을 묶는 데 도매금으로 끼인 송사리에 불과했다.
오갈 데 없는 그는 아예 미혜의 아파트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아내가 정치적인 압박을 핑계로 도망쳤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이유는 방태산의 여성 편력에 진절머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최근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정권을 잡고 있던 세력은 일부 해금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명단 속에는 방태산도 들어 있었다. 사실은 그만큼 그가 비중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로서야 절호의 기회를 다시 잡은 폭이었다.

그러자 이제는 미혜가 슬슬 짐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너무 어리고 그를 뒷받침할 재력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녀의 육체에서도 싫증이 나기 시작하던 참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혜로서는 결코 그를 놓칠 수 없었다. 그에게 그만큼 깊이 빠져 있기도 했거니와 그의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그녀는 곧 임신 사실을 알려 방태산의 결심을 굳히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방태산은 그날 아침 나간 이후 들어오지 않았다. 계엄령은 해제되고 정치 바람이 전국에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봄을 맞은 듯 여기저기서 정치 지망생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방태산은 미혜를 영영 잊은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미혜는 방태산을 찾아 나섰다. 그의 사무실에 수십 번 전화도 걸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미혜는 정신없이 그를 찾아 해맸다. 드디어 선거 유세장에서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가갈 수가 없었다. 두꺼운 외투에 가려진, 불러오기 시작한 그녀의 배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방태산의 곁에는 새로운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노애리라는 여인이.
그녀는 아파트로, 자신의 초라한 아파트로 돌아왔다. 밤을 새워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두 통의 긴 편지를 썼다. 한 통은 방태산에게, 한 통은 미국의 언니에게.

다시 부모님에게 남기는 짧은 유서를 썼다. 그리고 그날 밤, 2월 13일 그녀는 극약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괴산의 부모는 그녀를 누가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녀가 유서에 다만 남의 애를 배고 배반당한 못난 여식이 죽음으로 사죄한다고 써 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는 그 남자를 쫓을 능력도 지니지 못했다. 그냥 땅을 치고 통곡만 했다.

미국에서 잠시 돌아왔던 그녀의 언니도 그녀가 신신당부해  놓았듯이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일체 함구하였다.
쓸쓸한 그녀의 장례식에 방태산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선영들께 부끄럽다고 고향에도 가지 못한 그녀의 시신이 묻힐 때도 비가 내렸다. 겨울이 채 가지도 않은 날의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비가 새로 생긴 조그만 그녀의 묘 위에 그칠 새 없이 뿌려졌다.

생각을 되새기던 오명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나쁜 자식⋯ ’
오명자가 새삼스럽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스럽게 되돌아 보았다. 아니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면 빠져나가기 싫은 것이다. 그로 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받는 것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요구하는 그의 정열적인 정사가 싫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명자는 그런 자신이 저주스럽기도 하고 더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누구시죠?”
오명자의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명자는 눈물을 훔치며 돌아보았다. 자줏빛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저는⋯ 신미혜의 친구입니다.”
뭐라 딱히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오명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자신의 처지가 죽은 신미혜와 다를 바 없다는 동료의식이 들었다.
“헌데 당신은 누구시죠?”

“나는 이 무덤 주인의 언니입니다.”
신미혜의 언니 신지혜가 조용히 말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명자는 신지혜의 얼굴에서 어렴풋하던 신미혜의 얼굴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14. 수풀 속으로 숨다

형주와 정자는 근처의 해장국집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이제는 뭘 할 거야?”
정자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쇼핑.”

형주는 간략하게 대답하고 일어났다.
“쇼핑? 무슨 쇼핑?”
“네 옷가지들을 사야지.”
“내 옷가지라고?”

정자는 정말 기뻐서 고함을 쳤다. 형주는 그런 정자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란 어떤 경우에 처해도 옷과 같은 외모를 꾸미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인 모양이다.
“그러고 나선?”
“방을 하나 잡고 혼례를 치러야지.”

“피!”
정자는 콧방귀 뀌긴 했지만 소녀처럼 가슴이 설렜다.
“아, 자유스러움이란 이런 걸까?”
정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형주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사실은 바로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려 했는데 정자 주민등록증 때문에 조금 더 머물러야겠어.”

“그것 때문에 꼬리가 잡히는 건 아냐?”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형주는 자신만만했다.

형주가 주민등록증을 위조하여 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형주가 정자의 인물 사진을 가지고 주민등록증 위조 조직을 찾으러 돌아다닌 사이 정자는 여관에 머물면서 쇼핑과 군것질로 시간을 보냈다.
형주가 닥치는 대로 집어준 돈다발을 백 속에 넣고 정자는 쇼핑을 나섰다. 돈을 그렇게 마음대로 써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여러 가지 옷부터 닥치는 대로 사 입었다. 평소에 그녀가 원하던 보라색 볼레로 스타일의 옷이 첫 품목이었다.

 정자의 즐거운 쇼핑은 게속되었다.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도 세 벌을 샀다. 구두도 최고급 브랜드로 두 켤레를 샀다. 돈을 마음대로 쓴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몇만 원에서 기십만 원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물건을 그렇게 산다는 것이 어쩐지 떨렸지만 살수록 점점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들의 정사도 전과는 달랐다. 더욱 신나고 즐거웠다. 그들은 쇼핑하는 틈틈이 밤과 낮의 구분도 없이 침대 위에서 벌거벗고 뒹굴었다.

신나는 사흘이 지난 후 형주는 재벌 2세 같은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후후후, 형주 씨 넥타이 맨 거 첨 봤어.”
“어때? 괜찮어?”

형주가 빙긋이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본래 미남인 그가 그렇게 차리자 정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인물이었다.
“제비족 같아.”
“뭐?” “호호호”
그들은 한참 웃다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작가 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